[김지수의 인터스텔라] 90세 혁신가, 노라노 "야망 앞서면 일 그르쳐... '건달'처럼 살아야"

입력 : 2017.11.18 07:00 | 수정 : 2017.11.22 08:08

 

- 90세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 하루 7시간 노동… 최근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 평전 발간

- 열 아홉에 미국행, 1953년 전쟁 중에 최초 패션쇼, 70년대 미국에 1000만 달러 의류 수출

- 육영수, 이희호 영부인 의상부터 엄앵란, 윤복희 미니스커트까지

- “내 비위 내가 맞추는 ‘건달 정신'으로 70년간 한국 패션 산업 개척"... 

- “젊은이들, 야망 위해 일하지 말라… 능력과 체력 90%만 쓰고 10% 남겨둬야”


90세 현역 디자이너를 찾아가는 길은 간단했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못하는 나이 드신 기사 양반도 학동사거리 모퉁이 하얀집을 쉽게 찾아냈다. “그분이 의상 일을 오래 하셨죠? 노라노,라는 이름 아주 옛날부터 들어왔어요. 저 자리에서만 한 30년째 봤어요.”


만나자마자 노라노 여사는 며칠 전에 동갑내기 90세 노인이 노라노 매장을 찾아왔었다는 일화를 이야기했다. ‘학동, 노명자, 노라노’ 라고 쓰인 쪽지 하나 들고서. 작고한 베스트프렌드(한국일보 고 이무현 기자)의 친구였던 그 노인은 양로원 수속하러 서울 왔다가 죽기 전에 노라노를 한번 보고 가자는 일념으로 청원 경찰 2명과 함께 찾아왔다.


“90세 노인의 얼굴을 보고 내가 저렇게 늙었겠구나, 했어요.” 그녀가 인절미와 원두커피를 앞에 두고 호탕하게 웃었다. 누군가는 조용히 삶을 정리하러 양로원으로 들어가는 나이에, 그녀는 여전히 현직 디자이너로 유럽에 수출될 옷의 패턴 작업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 스트레칭과 산책을 해온 습관 덕에 허리는 꼿꼿하고 얼굴빛은 더없이 맑았다. 10년 전에 그녀를 만났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검은 정장에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유럽의 석조 건물처럼, 선생 자신이 살아있는 한국의 유물로 세련된 좌표로 매일 아침 저 자리를 지켰다. 가히 혁신에 가까운 성실함이다.


“요즘에 디자인은 안 해요. 내 걸 주장하면 젊은 사람만 힘들지요. 대신 스타일화를 보고 옷의 구조를 만드는 패턴만큼은 내가 떠요. 기초가 튼튼하니 정실장(브랜드 노라노(Nora Noh)를 경영하는 그녀의 조카며느리 정금라)이 나를 이렇게 오래 써먹는다니까. 하하하.”


그런 그녀가 얼마 전 고객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는 영국 황태자비 케이트 미들턴 스타일이었다. 그 시들지 않는 동시대적인 감각이란! 나는 이 현대적인 젊은 노인을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전쟁 중에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연 유학파 디자이너이자 60년대 윤복희를 앞세워 미니스커트와 탄탈롱의 시대를 연 유행 선도자, 1979년 이미 뉴욕 7번가 메이시스 백화점 1층 쇼윈도를 ‘노라노’로 점령시킨 글로벌 패션 CEO로 연간 1000만 달러 이상 대미 수출 실적을 올린 유일한 산업형 디자이너, 70년간 중단없는 작업으로 “내가 샤넬을 이겼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세계 최장수 현역 디자이너를!


“내가 염색한 미국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이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더 신기한 건 지난날을 현재의 정신 연령으로 윤색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만 기술한 이 영원한 현역의 맑고 투명한 정신력이다.” 살아 생전 소설가 박완서는 노라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영원한 현역의 맑고 투명한 정신력! 이것이야말로 100세 시대를 앞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인생 모습이 아니던가. 이따금 작업실의 호출에 불려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노라노 여사와의 단독 인터뷰가 이어졌다. 얼마 전 출간된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마음산책)’을 매개로 귀하게 얻은 기회였다.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은 방송 기자 출신 최효안이 그녀를 10년간 관찰해서 기록한 세밀한 평전. ‘죽은 뒤 출간하라'는 선생을 설득시키느라 애를 쓴 출판사 마음산책의 정은숙 대표와 최기자가 동행해서 인터뷰 현장엔 시종일관 웃음꽃이 피었다.



-90년을 살아보니 인간은 어떤 존재라는 깨달음이 있습니까?


“내가 살아보니 인간은 근본이 두 가지예요. 첫째로 게을러요. 둘째로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뻔뻔하진 않아. 그래서 좋은 마음이 생기면 오래 생각하고 주저하면 안 돼요. 머리에 떠오르면 바로 액션을 해야 한다고.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는 것도 나는 5초 만에 기립이야. 미국 유학도 패션쇼도 수출도 심지어 IMF 때 사업을 대폭 축소한 것도 나는 결정을 하면 바로 실행을 했어요. 계속하게끔 환경을 정비해가면서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너는 시작하기가 어렵지, 한번 하면 참 잘한다, 그러셨지요.”


-예전부터 ‘나는 평생 건달처럼 살았다'고 일명 ‘건달론’을 펼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건달 앞에 꼭 백수라는 수식이 붙잖아요. 백수건달. 건달 하려면 돈에 연연하면 안 돼요. 건달처럼 살려면 돈에 관심이 없고 살면서 자기 비위를 잘 맞춰야 해요. 나는 항상 나한테 물어봤어요. “노라야! 너 뭐 하고 싶니? 노라야! 너 뭐 먹고 싶니?” 남이 내 비위 안 맞춰줘요. 내가 먼저 내 비위 맞추고 나면, 남의 비위도 즐겁게 맞출 수 있어요. 그게 건달 정신이죠.”


-실례지만 하루에 몇 시간 일하십니까?


“7시간 노동해요. 토요일에도 정오까진 일해요. 디자인은 안 해. 90세면 내 감각이 안 맞을 수 있으니까. 우리 식구들은 내가 ‘저거 밉다' 그러면 잘 팔린대(웃음). 대신 옷의 구체적인 패턴은 내가 떠요. 요즘엔 국내 고객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영국, 중동에서도 주문이 많아요.”


-90세 연세에 하루 7시간 노동이 무리는 아니신지요?


“일하는 데 최적화되도록 몸 관리를 해요. 어제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간식 주러 와서는 나 일하는 거 보고 신기해하더군요. “그림만 보고 그걸 어떻게 만들어요?”하면서. 패턴은 평면 디자인을 입체 골격으로 만들어주는 거라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다행히 나는 그 기본기를 스무 살에 미국에서 배웠어요.”


노라노는 1928년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아버지(노창성)와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어머니(이옥경) 사이에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살 때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지만, 전쟁 통에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본명은 노명자. 노라는 여성 해방의 불씨를 댕긴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19살에 이혼 후 독립을 선언한 노명자가 미국행 여권에 써넣은 제2의 이름이다. 노라노는 17세에 일본군 장교 신응균과 38세에 미군 장교 출신 짐 핀클과 짧은 결혼 생활 후 이혼했다.


-‘야망의 불꽃'을 간직하고 살아왔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어요. 젊은이들한테도 야망을 위해,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건 멋진 인생이 아니라고요. 무슨 말인가요?


“내가 얼마 전 파티에서도 그랬어요. 행복하려면 크게 출세할 생각 말고 웬만큼 살라고. 부러워하지 말고 네 몫만 찾아서 살라고. 크게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람 뒷조사해보면 다 분노가 있어요. 내가 얼마 전 박경리 선생 수필을 읽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가 부글부글하더라고. 그러니 ‘토지'라는 그 어마어마한 대작을 쓴 거예요. 하지만 행복하게 살려면 출세할 희망을 버리는 게 좋아요.”


-선생도 열아홉에 실패한 이혼녀로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마음에 분노가 가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내가 지금 요만큼이라도 된 건 이혼하고 사회적 지탄을 받고 집에서도 쫓겨난 게 너무 억울해서였어요. 내가 내 삶을 살겠다는데 왜 그리 말들이 많아. 그런데 그 분노도 없었으면 요만큼도 못 이뤘을 거예요(웃음). 분노를 잘 승화시켜서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온 셈이죠.”


-그 분노를 출세욕이 아니라 당대의 소명으로 풀어낸 게 참 놀랍습니다. 미국에서 취직하고 자리를 잡았는데도 굳이 전쟁을 앞둔 고국으로 돌아오셨지요?


“그랬어요. 그랬지요. 그 당시 유학 떠난 사람 중에 돌아온 사람은 나밖에 없어. 밖에서도 다들 어려운 처지라 내가 유학생들 불러다 불고기를 해먹이곤 했어요. 그런데 그이들 중에 돌아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구먼(웃음). 어쨌든 나는 내 고국에 내가 배운 걸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GNP 57불이던 시절에 내 비행깃값 1천 불 중에 650불을 마련해 줬거든.”


노쓰웨스트 항공 기록에 의하면 김자경 오페라단의 김자경에 이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두 번째 여성이 노라노였다. 1947년에 LA의 프랭크왜건테크니컬칼리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스포츠의류회사에서 일하던 노라노는 1949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졌다. 그녀는 피난지 부산으로 내려가 병원에서 피난민을 간호했다. 마취제도 없이 다리를 잘라야 했던 소녀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했다. ‘패션 대신 의학을 했으면 사람들을 살렸을 텐데' 후회도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수순처럼 다시 의상실을 개업했다. 형제 많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은 그녀 몫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전쟁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갔다.


-전쟁 중에도 비참함과 화려함을 다 관통하셨습니다. 그 삶의 간극에 현기증이 일 정도인데요.


“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피난지 부산 병원에서는 죽어가는 사람 돕는 게 일이었어요. 서울에 와선 또 돈을 벌어야 하니까 옷을 만들었죠. GNP 57불 시절에 누가 옷을 사 입겠냐 했지만 의외로 고객이 많았어요.

그걸 미국 NBC에서 찾아와서 ‘전쟁 중에도 문화가 살아있다'는 취지로 찍어갔어요. 1953년에 취재진 앞에서 최초로 비공개 패션쇼를 했죠. 전쟁 중이면 모든 게 스톱될 거 같지만, 일상도 낭만도 계속돼요. 그게 희망인 거죠.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에요. 난 그저 오는 걸 막지 않고 피하지 않았어요. 물 흐르듯이 살았죠.”


그녀의 뒤로 미술가 조덕현의 여성 시리즈 작품인 ‘노라노’의 입체 초상 작품이 걸려있다. 콩테로 그려진 담백한 상반신 아래로 무명천이 액자 밖으로 강물처럼 흘러나온 유명한 설치물이다. 2008년 81세의 노라노를 모델로 한 작품이지만, 90세의 지금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화가 조덕현은 “노라노는 한국 사회에서 서구의 패션 트렌드를 전수한 데서 그치지 않고 문화혁명가의 삶을 살았다"고 기록했다.


-돌아보니 인생 전성기는 언제던가요?


“50대에서 60대 사이가 참 좋았어요. 미국에 한창 수출할 때죠. 국산 물실크를 개발해서 만든 내 옷이 뉴욕 삭스 백화점에서 나부낄 때, 뉴욕타임스나 시카고데일리뉴스에서 ‘노라노는 시대 감각에 맞고 절제된 멋이 흐른다’는 평을 봤을 때… 기분 최고였죠. 하와이 쇼 후엔 ‘마담 노는 뼛속까지 쉬크하다' ‘엘레강스의 정점이다'라는 찬사를 들었어요. 정말 신이 났지요(웃음).”


1973년, 그녀는 국산 물실크를 개발하기 위해 한강에 돛단배를 띄우고 실크 원단을 매달아 물에 씻는 혁신적인 수세 공법을 감행했다. 패션이란 장르가 꽃을 피우려면 반드시 우리 땅에서 생산된 원단을 써야 한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가만 보면 성실과 혁신을 양손에 쥐고 오가신듯 합니다. 운동, 식사, 노동 시간은 칸트의 시계처럼 규칙적이지만, 인생 여정을 길게 보면 두 번의 이혼, 파리 프레타 포르테 첫 진출 등 파격적인 점프가 많았습니다. 현실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과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두 마음에 충돌이 있지는 않았는지요?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생각은 옳은 길을 가면 다 만나게 되어있어요. 일례로 미국 수출할 때도 프린트 공장을 세워서 마티스나 미로 같은 화가의 그림을 도안으로 썼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브 생로랑도 똑같은 시기에 나와 같은 작업을 했더라고. 나는 서울에 그는 파리에 있었는데도 멀리서 같은 길을 갔던 거죠. 그런 게 참 신기해. 성실과 혁신도 다르지 않아요. 성실이 쌓이면 자연스레 혁신으로 가게 되는 거죠.”


-‘실용적이고 고급스럽게’가 선생의 생활의 신조이자 패션의 신조였지요?


“맞아요. 복잡한 생각, 쓸데없는 생각 안 하고 살았어요. 옷도 허세 없이 실용적이고 멋스럽게 만들려고 했지요. 산문시를 쓰듯이. 군더더기가 있으면 시가 안 되잖아. 그래서 그런지 예전 고객들이 지금도 옷 해내라고 난리야(웃음).”


-만드는 옷은 다양한 컬러를 쓰면서도 늘 블랙만 입으십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검정은 좋아한다기보다 일하기에 좋은 복장이라 그래요. 다른 색이 들어가면 구두에서 가방까지 다 색을 맞춰야 하잖아(웃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다 30년이 넘은 옷이에요. 액세서리도 똑같죠.”


-일하는 게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미소지으며)내 행복은 일하는 거예요. 일해야 행복해요. 일을 안 하면 봉사라도 해야 해. 사람은 무용지물로 살면 자기 가치를 잃기 쉬워요. 나이 들어도 생산적인 일을 안 하면 죽기만 기다리게 된다니까. 얼마 전 98세 되신 철학자 김형석 선생을 만났는데 그분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일이라더군요.”


98세인 김형석 선생과 90세인 노라노 선생… 100세를 앞둔 두 거인이 만났다는 사실이 자못 신기했다.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작년에 ‘현자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이야기 중 ‘가장 감사한 건 일을 한다는 것이고 가장 힘든 건 외로움이더라'는 내용이 기억났다. 두 분이 소개팅하셨냐고 물었더니 노라노 여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소개팅을 빙자한 식사 자리였어요. 호기심이 일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분도 일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건 다 버리셨다고 하더군요.”


-김형석 선생은 100세 가까이 이르니 고독이 가장 큰 문제라 하셨어요. 선생은 어떠신지요? 외롭다고 느끼진 않습니까?


“바쁜데 뭐가 외로워요. 일하느라 가족 건사하느라 정말 바빴어요. 요즘엔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지만, 예전엔 뭐든지 발품을 팔아야 했으니 더 바빴지. 뉴욕, 파리, 밀라노, 로마 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하루에 백여 벌 씩 옷을 입어보느라 호텔에 오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졌다고. 84살까지 파리에 다녔어요.”


-혜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부모의 혜택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께 손님을 정중히 맞이하는 귀족 교육을 받았다면 아버지께는 일하는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서민 교육을 받았어요. 아버지는 고아로 나서 자수성가한 분이셨는데, 누가 일하는 사람을 못살게 굴면 바로 모가지를 날리셨어요(웃음). 일하러 온 시골 애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우리 형제들이 비웃으면 크게 나무라셨죠.

저 아이들과 너희 차이는 딱 하나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다. 부모 잘못 만나 불우해진 이웃을 보면 차별하지 말고 관대하게 대해라.” 그 말씀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어요. 미국 있는 남동생이 ‘누나는 나의 아버지였다' 그러면서 나한테서 평생 ‘노력해라, 정직해라, 관대해라’ 이 3가지를 배웠다는데, 그게 다 아버지 말씀이었어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프린세스였어요(웃음). 젊을 때 사고로 다리가 불편하셨는데도, 항상 저보다 먼저 일어나 화장하고 커피 내려서 나를 맞이하셨어요. 이방자 여사(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부인)도 우리 집에 두 달 정도 머무셨는데 엄마와 잘 맞았어요. 검소하고 기품이 있으셨지요. 반면 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어머니는 나를 늘 불안해 하셨어요(웃음).”


-시대를 앞서가셨으니까요(웃음). 열아홉에 이혼하고 여의도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그 앞에 이런 인생이 펼쳐질지 예상했나요?


“앞서가려고 의도한 게 아니에요(웃음).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독립할 방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지요. 유학을 알선해준 은인인 식산은행의 스미스 사장 비서 자리도 쉽게 찾은 건 아니었어요. 영어와 타이핑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타자기 자판을 종이에 그려서 닳도록 연습하고, 영어회화책을 매일 밤 베고 잤다니까요(웃음).

그래도 기특한 건 희망이 있었다는 거.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생각지도 못한 어딘가에서 구원의 손길이 오고, 그 누군가에 의해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가 됐어요.”


노라노는 20년 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생각해보니 그게 하늘의 손길이더라"고 부연했다.

“90년 동안 하늘에서 많이 봐주셨어요. 그런데 쉽게는 안 봐주셨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기 직전에 딱 길을 열어주시더라고.”


-좋지 않은 기억은 없습니까?


“50대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30년 사회 생활하니 날 모략하는 사람도 나타나더군. 너무 분해서 전화기를 들었어요. 3번쯤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생각해보니 30년간 날 괴롭힌 사람이 딱 두 사람하고 반이에요. 나머지는 나를 다 도와준 사람이더라고. 얼마나 감사한지, 그때부터는 싫은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부터 좋은 점을 찾아서 찬양하기 시작했어요. 사람 미워하고 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잖아. 그때부터 극복이 됐어요. 그 뒤로 40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미웠던 사람은 딱 두 사람 반이야(웃음).”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것을 두 가지만 꼽으신다면요.


“첫째는 이혼한 거, 둘째는 미국 시장 진출한 거예요. 그만큼 인생에선 잃는 것과 얻는 것이 공평해요. 그리고 살다 보면 알게 돼. 인간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자기 생긴 모양만큼 살게 된다는 걸 말이지요.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하려 들면 스트레스만 받지 더 잘 되지도 않아. 그렇다고 더 밑으로 떨어지지도 않죠.”


-얼마만큼 노력해야 적절한 겁니까?


“일할 때 능력과 체력의 한계에서 10% 정도 여유를 둬야 해요. 젊은이들한테도 내가 당부를 해요. 100% 다 하려고 하지 말라고. 얼마 전에 만난 일본 교포도 3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고 자랑을 해서, 내가 ‘그거 위험하지 않아?' 걱정을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엊그저께 쓰러졌대. 여러분들은 아직 인생을 반도 안 살았잖아. 그러니 내 말을 믿어요. 90년 산 내 지혜로 말하면 항상 10%는 남겨둬야 해.”


-요즘엔 주로 어떤 기억이 떠오르시나요?


“90년 인생이 영화처럼 다 떠올라(웃음). 세 살 때 기억이 유독 선명해요. 7살까지 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주말이면 인력거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갔어요. 인력거에 내려서 엄마한테 달음질쳐가던 모습이 기억나요. 어찌나 기쁘던지… 미국 있을 때 안창호 선생 아들(할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 배우 필립 안)과 소개팅도 했고, 프랭크 시내트라한테 장미꽃을 선물 받은 기억도 생생해요(웃음). 참 로맨틱한 인연이 많았지요.”


-누가 보고 싶으신가요?


“부모님, 할머니… 돌아가신 분들이 보고 싶죠. 엊그저께 죽은 친구도 보고 싶어요.”


-나중에 그분들 만나면 뭐라고 하고 싶으세요?


“고맙다고. 특히 할아버지(외조부 이학인은 영친왕 영어 선생이었고 그 시절에 사파리 양복을 입을 만큼 멋쟁이였다) 덕에 잘 살았으니 뵈면 고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장인정신이 있었던 사람. 디자이너는 고상하지 않아요. 항상 고객의 신체와 취향을 맞추는 감정노동자고 동시에 장인이에요. 과대평가하는 건 싫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던 사람. 욕심 없이 순리대로 쉬지 않고 계속 갔던 사람. 그 정도면 좋겠어요.”


-일하는 70년 동안 쉬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까?


“없어요. 그 점에선 내가 샤넬 여사보다 한 수 위야. 샤넬을 이겼다고(웃음). 그래도 필요 이상의 확장은 안 했어요. 접을 땐 딱 접었죠. 예전에 모 대기업 회장 부인이 “노 여사는 왜 더 확장을 안 해?” 물어서 내가 그랬어요. “했으면 병원 갔을걸! 회장들처럼 말년을 병원에서 보내라고? 난 싫어. 이래 봬도 나 백수건달이야(웃음).”


문득 지난해 김형석 교수를 만났을 때, 98세 철학의 대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그리고 두 어른이 함께 만난 자리에서 노라노와 김형석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직업은 소중하되 사람을 구속하니, 스스로 인간으로 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헤어질 때 왠지 아쉬워 오래 그녀를 안아보았다. 나보다 더 곧고 단단한 몸이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하루 7시간 노동하는 90세 백수건달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스스로 잘났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인간적으로는 꽤 쓸만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Posted by pritata
,